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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스토리텔링 해부학교실을 시작하며

수 많은 아쉬움과 뜨거운 눈물을 남기고 소치 올림픽이 막을 내렸습니다. 스포츠 이벤트가 언제나 그렇듯 이번 올림픽에서도,   선수들 모두는 저 마다의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우리는 그들의 환희와 눈물에 함께 소리 지르고, 눈물을 흘리고, 깊은 탄식과 따듯한 위로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김연아 선수의 아쉬운 은메달과 우아하고 위엄있는 미소가 남긴 긴 여운이 한 동안 온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이 뜨거운 열기와 깊은 탄식이 오가던 사이로, 김연아 선수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E사의 광고가 한 동안 시끄러운 입방아에 오른 일이 있었습니다. 

너는 아름다운 대한민국’이라는,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때면 흔하게 들려오는 ‘애국가’의 변주곡 같은 이 야기가, 이번에는 예상치못한 반발에 부닥치며 서둘러 막을 내려야 했던 것이죠. 심지어는 한 네티즌이 만든 패러디 영상 ‘당신은 김여아입니다’(

)는 광고의 메시지가 무엇이 잘 못 되었는지를 여실히 폭로하며 수 많은 네티즌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기에 이릅니다. 결국 해당  광고는 올림픽 참가 선수를 모델로 쓸 수 있는 값비싼 비용을 이미 치르고도 자진해서 매체에서 내려지고 말았습니다. 

더이상 문제는 메시지가 아니다! 

흔히들 이 논란에서 메시지가 잘못되었다는 지적을 많이 합니다. ‘너’라는 호칭에 대한 원초적인 거부감에서부터, 김연아 선수의 개인적 성취를 가로채는 듯한 ‘김연아 = 대한민국’이라는 논법이 무리수라는 지적도 있고, 이런 방식의 애국심에 호소하며 슬그머니 숟가락을 얹는 논법이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는 질타에 이르기까지, 그 광고 안에 담긴 메시지의 오류를 지적하는 비판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정말 문제는 ‘메시지’에 있지 않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 광고에는,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의 의도가 너무나 쉽게 까발려졌다(?)는 미숙함도 있지만, 정말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는 이들이 이야기를 만들고 소통하는 방식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1)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주체’로서의 기업(혹은 브랜드)2) 그 광고 ‘메시지에 반응하는 대상으로서의 소비자’를 가정하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대중매체 시대의 문법’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게 이 논란의 본질에 담겨있는 치명적인 오류입니다.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오늘날 이야기를 만드는 건 누구일까요? 

언뜻 보면 당연한 걸 묻는다 싶은 질문이지만, 디지털 기술과 네트워크의 발달과 소셜 미디어의 폭발적인 성장이 의미하는 근본적인 변화에서 본다면, 이야기를 만드는 건 이제 소비자와 개개인의 사람들이라고 해야 합니다. 이야기를 만드는 주체로서의 ‘작가’, ‘방송국’, ‘광고 대행사’, ‘기자’, ‘편집자’ 같은 전문가와 시스템이 한 축에 있고, 다른 한 쪽에 아무생각없이 그 이야기를 처묵처묵하는 대중을 가정하는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그 다른 한편에 놓여져버린 ‘대중’의 일원(?)으로서 너무나 기분나쁘고 모욕적인 느낌이 들지 않을까요? 그들은 이런 기분나쁜 감정을 손쉽게 자판에 실어 댓글을 날립니다. 비꼬고 조롱하며, 메시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리저리 비틀며 놀이를 합니다. 이 이야기를 기획했던 사람들이 기대했던 뜨거운 감정은 차가운 냉소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버립니다. 김연아 선수를 주인공으로 한 E사의 광고가 당한 처참한 난도질은 바로 이러한 감정 구조와 맥락하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지만 이런 얼척없는(?) 일들이 아직도 매일매일 벌어지고 있습니다. TV에서, 신문에서, YouTube로 옮겨온 ‘바이럴 영상’이라는 콘텐츠를 통해서도, 새로 개업한 가계의 전단지에서도, ‘블로그 마케팅’이라는 둔갑술에 몸을 감춘 광고성 리뷰들에서도… 이런 접근방식의 이야기는 하루에도 수백건씩 사무실의 어딘가를 떠돌며, ‘히딱한 것’, ‘쌈빡한 꺼리’, ‘한 방에 보내버릴 이야기’, ‘쥑이는 영상’ 등의 모습으로 유령처럼 떠돌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독자와 소비자에 의해 완성된다. 

우리는 아직도 이야기를 만들 때, 설득과 감정이입을 요구하며 대상으로서의 독자를 가정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누구의 손에나 저작 도구가 쥐어져 있고, 콘텐츠를 만드는 데 필요한 정보와 소스는 어디에나 넘쳐나는 세상에서, 그 어떤 이야기이든 최종 소비자가 또 다른 창작자이자 편집자, 각색자이자 비평가인 환경 속에 던져지게 되는데 말입니다! 

이제는 이야기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 근본적인 반성과 새로운 혁신이 필요합니다. 작가적 의도와 잘 짜여진 구조, 몰입과 이완의 리듬을 조율하는 장인의 솜씨, 살아있는 캐릭터와 호소력 깊은 연기에 의해 만들어지는 ‘잘 만들어진 극(well-made drama)’가 더 이상 상식적인 접근이 될 수 없게 되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야기의 완성도가 흥행과 고객 (혹은 독자, 관객, 청중)의 반응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수 많은 경험을 통해 이미 확인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문법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스토리텔링의 해부학 교실”이라는 괴상한(?) 제목을 달고 연재를 시작하는 까닭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어떤 막연한 필요 때문입니다. 기존의 모든 이야기 하기 방식(스토리텔링, 광고제작법, 드라마투르기, 프레젠테이션, 강연 등 저마다의 이름은 조금씩 다르겠지만)은 이제 ‘디지털’화 된 시대에 의해 만들어진 변화의 본질을 깊숙히 들여다봐야 합니다.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소통되는지, 누가 이야기의 생명력을 좌우하는지, 왜 어떤 이야기는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되살아나며 왜 어떠 이야기는 그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잊혀져버린 기록 속에 잠겨버리게 되는지… 이제 본격적으로 팔을 걷어부치고, ‘새로운 시대의 이야기 생명체’를 파헤치고, 뜯어보고, 재구성해보고, 실험해보는; 무지막지하고 무식하며, 전례도 없고 따라할 법칙도 없는, 새로운 이야기 방법을 찾기위한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다음 글 ‘이야기는 어떻게 완성이 되는가?’에서는 이야기하기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 조금 더 깊숙한 곳을 들춰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서운 해부학교실의 이야기는 매주 토요일에 돌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