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최진실씨의 사망 소식을 당일 새벽녘에 인터넷 포털 사이트 인기검색어 순위에서 발견하였습니다. 고인의 성품이나 그간의 활동과 살아온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설마’하는 생각을 하며 검색어를 클릭했습니다. 처음에는 또 그저 그런 낚시성 검색어겠거니 무시도 했었지만, 호기심이란 참 주체할 수 없는 충동인 것 같습니다. 기사의 제목들은 하나같이 충격적이었고, 환하게 웃고있는 고인의 사진을 보면서, 왠지 현실감이 오지 않는 멍한 느낌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찬찬히 살핀 기사에 따르면, 고인을 둘러싼 ‘악플‘이 그녀를 끊임없이 괴롭혔고, 그것을 감당하기 힘들었던 고인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내용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순간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그녀의 죽음과 통제되지 않는 미디어의 사나운 발톱이 나란히 놓이면서 다른 방향에서의 폭풍이 엄습해올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한나라당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사이버 모욕죄를 신설하겠다고 한다.. 고소고발이 없어도 악플에 대한 인지수사를 할 수 있는 법안이다.. 인터넷이란 문명의 이기가 파생한 이 잔인하고 무자비하며 비열한 세태에 마침표를 찍겠다는 의도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며 늦은 감까지 있다.. .” (엔파람(www.nparam.com) 시대유감님의 논설 “최진실법, 반대하는 자들은 뭔가!” 중)
그 불길한 예감은 한나라당 홍준표의원이 발빠르게도 ‘최진실법 반드시 통과시킬 것’이라는 의지를 천명하며 논란을 가열시켰고, 위의 ‘시대유감’ 같은 논객들의 부르짖음이 뒤따랐다. 몇 년 전엔가도 “그린박스제도“라는 것을 입법화 하려했던 전여옥 의원은 자신의 경험담을 얘기한다며 인터넷 매체의 문제점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타인에 대한 잔인한 본능, 공격성을 지니고 / 인터넷에서 익명성으로 무장하고 / 그야말로 무자비한 공격을 합니다” [출처] 최진실의 ‘장미빛 인생’|작성자 전여옥
인터넷 매체가 가진 불안전성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미디어적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기간에 비해 그 영향력은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 나름대로의 질서와 자정기능을 가진 미디어 생태계가 형성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한 구석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문화적 현상들이 삐져나오고 있습니다.
‘악플’이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악의적 가십’ 또는 한 개인의 명예를 무책임하게 땅에 떨구는 ‘근거없는 헛소문’들은 수 많은 피해자들을 쏟아내고 있고, 그로 인해 가슴아픈 뉴스를 접하게 되는 빈도도 점점 잦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마땅히 사회적 규범아래 걸러지고 다스려져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건들은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킬만한 일이기 때문에, 한 순간에 냉정을 잃고 광풍으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최진실법’이란 수식어를 달고 등장한 ‘사이버 모욕죄’의 법안 같은 움직임이 그런 것이죠.
이러한 법안의 상정은 우리 사회의 중요한 문제에 대한 ‘의제 설정’ 기능이 있기 때문에 그 자체는 당연히 필요한 입법제도의 일부로서 존중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그 법안이 현실적으로 기대한 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지, “법은 최소한’이라는 말마따나 ‘사이버 모욕’이라는 문제가 법으로 밖에는 규범을 지키게 할 수 없는 문제인지, 그 법안으로 인해 야기될 또 다른 문제는 없는지 차분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한 유명인의 죽음이 인터넷 악플에서 비롯되었다고 단정짓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 현상을 빌미로 본질을 도외시한 선동을 일으켜서는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미디어의 문제점은 반드시 인터넷 미디어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황색언론‘이라고 불리는 수 많은 매체들은 저급한 호기심과 선정적 이미지들로 광고를 끌어모으며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스포츠 신문 시장이 과열경쟁과 수익성 악화에 빠지면서 그들이 벌인 선정적인 편집과 낚시성 헤드라인 경쟁은 오늘날의 인터넷 매체나 ‘악플’의 문제와 본질적으로 같은 병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증권가의 루머들이 피워올리는 ‘카더라 통신’의 이야기는 거의 화장실 낙서나 다름없는데도, 나름대로 근거있는 정보 소스로 간주되며 여전히 날개돋힌듯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여론을 형성시키는 언론매체의 제도적 기능과 기여는 반드시 지켜져야 할 민주주의의 가치이지만, 그 이면에는 항상 어두운 그늘을 늘어뜨린 병폐가 함께 해왔던 것입니다.
최진실법을 반대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그의 유가족들로부터 동의를 받은 것도 지지를 얻은 것도 아닌 이 명칭은 도대체 어디서 유래한 것이란 말입니까? 만인의 사랑을 받던 배우 고 최진실씨의 죽음과 인터넷 미디어의 병폐를 동일시 하려는 이름붙이기는 아닌지요? 현상적으로 나타난 문제의 심각성은 수긍하지만,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도, 법안을 마련하고 신중하게 검증도 되지 않은 제도적 규약을 걸어버리는 것만이 올바른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아직 사회적으로 인터넷 미디어가 가지는 속성과 작동원리에 대해 충분히 성숙된 경험을 갖고 있지 않은데 말입니다. 좀더 차분하게 문제의 원인과 해결방법에 대해 사회적인 공론이 성숙되길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 제도적 폐해라는 것이 어느 날 하루 아침에 나타난 것이 아니듯, 그 해결점 또한 손쉽게 얻어지지 않는다는 걸 잘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익명성의 폭력은 반드시 근절되어야 할 사회적 병폐입니다. 그렇지만 ‘악플’의 문제도 다른 사회문제와 마찬가지로 그 문제를 박멸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건강한 인식과 문화의 힘으로 균형잡힌 디지털 문화 생태계를 유지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DDT와 같은 화학적 방제가 자연 생태계의 균형을 오히려 깨트려 더 큰 문제를 초래하였던 경험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고인의 죽음은 우리 사회에 커다란 상처와 아픔을 남겼습니다. 그 죽음이 불필요한 갈등과 대립의 단초를 일으킬 선동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위 ‘최진실법’으로 상징되는 일련의 감정적 선전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