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범에게 인권이 있을까? 인간의 권리 (human rights)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부여되고 지켜져야 할 원칙이라면, 살인번의 죄와 그의 권리에 대해서도 분리된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죄를 이유로 헌법으로서 합의한 인간의 기본권이 제한되거나 침해된다면, 우리는 아주 손쉽게 ‘인권’의 엄중함을 내던져버릴지도 모른다.
감정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죄의식조차 엿보이지 않는 그의 행위에 대해 인권을 운운한다는 게 그리 적당치 않다는 생각도 든다. 끔직한 범죄로 못숨을 앗긴 희생자들에게 우선 조의를 표하는 것이 우선이고, 애통하게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의 비통한 심정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살인범의 행동에 대해, 그리고 그의 무감각해보이기까지 하는 소름끼치는 행각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재판을 통해 형이 확정되지 않은 피의자의 얼굴이 만천하에 공개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리고 그의 살인행각에 대해 호들갑스럽게 떠들어대는 언론의 무책임한 취재경쟁에 대해서는 분명히 돌아보아야 할 문제가 숨어있다.
사회의 모든 시스템에는 얼마간의 결함이 있게 마련이다. 파렴치한 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법을 통한 심판이라는 것이 그 범죄의 희생자들에게는 너무도 만족스럽지 못한, 즉 일반적인 ‘법 감정’을 거스르는 일들도 때때로 일어나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만들고 지켜가는 사회체제의 어떤 부분들은 그럴만한 이유와 역사적인 경험을 통해 얻어온 지혜의 축적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죄형법정주의1나 형사소송에 있어서의 일사부재리의 원칙2, 무죄추정의 원칙3 등은 수 많은 시행착오와 역사적인 과오를 되돌아보며 만들어온 소중한 유산인 것이다.
그가 저지른 범죄가 끔찍하고 일반적인 법감정에 비추어볼 때 그 어떤 배려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적어도 사적인 감정으로는 그런 공분에 충분히 공감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 감정에만 충실하여 우리가 세워온 사회적 약속의 원칙마저 무너뜨리게 되면, 사사로운 보복의 감정이 끝없는 복수와 멈추지 않는 폭력으로 점철되어 사회체계가 무너져내리는 재앙을 피해갈 방법이 없게 된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고, 한번의 실수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낙인이 되어버린다면, 그 사회는 아픔을 딛고 새로운 미래를 이어나가는 생명력을 잃고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명제는 실천하기 참 어려운 선언이다. 그 만큼 복수심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이요, 해소할 길 없는 억울함과 분노는 다스리기 어려운 인간적인 면모일 것이다. 사회체제는 그렇기 때문에 사사로운 형벌을 금하고 죄의 대가에 대해 합의 된 댓가를 명문화하여 끝없는 보복의 사슬을 끊어낼 수 있게 짜여진 것이다. 적어도 사회의 안정과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감정보다는 이성이 앞서야 한다는 암묵적인 동의 속에 사회는 구성되어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보편타당한 공분이 널리 공감되어 있는 마당에, 사회 체제의 일부로서 기능하는 언론이 보다 냉철하게, 그리고 이성적으로 사건을 다루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 언론이 앞장서서 ‘국민의 알 권리’라는 명분을 방패삼아 헌법에 명시된 인권에 대해 예외를 만드는데 앞장선다는 건 분명 또 다른 중요한 원칙을 훼손하는 범법행위인 것이다.
언론은 이제라도 냉정을 지켜야 한다. 피의자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원칙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훼손되어서는 안되는 공공의 명제임을 되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의 얼굴이 노출되어 겪게되는 피의자의 아들과 가족들이 짊어져야 하는 고통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을 진단 말인가? 단지 살인범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주홍글씨를 달고 살아가게 만든다는 건, 그의 아들이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명예와 인격이 침해당하게 되는 공공의 린치를 가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모두가 공감하는 법감정이라는 이유로 황색저널리즘이 마구 날뛰어서는 곤란하다. 끔찍하고 충격적인 사건이 이 사회에 입힐 뼈아픈 트라우마에 대해서도 우리는 한 번쯤 냉철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인격장애’라는 조심스러운 비정상성의 꼬리표를 달아버리는 경향이 만연되어버린다면 그 댓가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는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상처입은 영혼을 돌보고 달래어 따듯하고 너그러운 사회의 품으로 끌어안으려는 노력은 사라지고, 조금이라도 격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에게 그 까닭을 헤아리지 않고 ‘인격장애’라는 판정을 남발하게 된다면…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불신의 악순환 속에서 더더욱 강력한 ‘공공의 폭력’을 용인하게 되는 길로 들어서게 될 뿐이다.
법은 최소한이라고 했다. 아무리 끔찍한 범죄를 눈앞에 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냉철하게 사회적 약속이라는 제도의 이성을 지지하여야 한다. 피의자의 인권은 지켜져야 한다. 그가 아무리 끔찍한 살인범이라도 말이다. 언론은 더 이상 호기심과 말초적 감정을 부채질하는 보도를 중단해야 한다. 그 대신 우리 사회가 더 안전하고, 서로를 신뢰하며, 배려와 용서로 성숙해질 수 있도록 하는 목소리를 내주어야 한다. 그 길만이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벗어나 미래를 향하는 생명과 인권의 가치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걸음임을 분명히 돌아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