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되면 내 덕, 못 되면 남 탓‘ 하는 것을 인지상정이라고는 하지 말자. 그런 마음이 이는 것에 대해 제발 부끄러워할 줄은 알아야 하지 않을까? 故 최진실씨의 죽음에 대해서 ‘(인터넷) 악플 때문이야’라고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대한민국 경제의 깊은 늪이 ‘미네르바 때문이야’라고 하지는 않을지 걱정이 앞선다.
경제의 문제는 삶의 방식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너무나 깊숙이 얽혀있는 문제이기에, 생활을 책임지고 사는 사람치고 경제 동향에 대해 귀를 쫑긋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흉흉한 소식들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가까운 곳에서 험한 일들이 벌어지면, 사람들의 마음속엔 커다란 동요와 불안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혼란의 시기엔 점쟁이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고, 종교행사에 열심인 사람도 늘어난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 현상을 누구의 탓으로 말할 수 있을까? 굳이 탓한다면 지도자의 부덕을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는 게 자연스러운 일 아닐까?
나라의 지도자는 모름지기 다스리기 보다 섬겨야 한다고 옛 지혜들은 얘기한다. 백성을 섬기는 일이란 이런 것일 것이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사는 보통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들을 도울 방법을 찾느라 부심하고, 실천할 수 있는 대비책을 세워 이끌며, 불안이 퍼지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우는 일 같은 것들… 우리의 지도자들은 왜 국민들의 불안한 마음을 다독이고 달래는 일에 관심이 없는 것일까? 그들의 안방에는 찬바람이 넘나들지 않고, 그들의 곳간에는 쌀이 넉넉하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현재의 위기를 통찰하는 지혜가 부족하단 말인가?
불안은 전염병처럼 자연스럽게 퍼지는 것이다. 희망을 얘기하는 목소리는 참담한 현실에 부딪혀 설득력을 잃게 된다. 불안의 그림자가 점점 현실로 나타나는 것을 목격하고 있는데, 어찌 위험을 경고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겠는가? 미네르바는 그 위험을 자각하도록, 아무도 바라지는 않지만,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다가오는 파국에 지금부터 대비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을 뿐이다. 그의 목소리가 경거망동하는 ‘몽매한 군중’을 선동한다고 여기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저녁 무렵 식당에 가면 깊은 탄식을 안주로 삼아 위험한 앞날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어르신들을 얼마든지 목격할 수 있다. 그들을 모두 입 단속을 시키기라도 할 작정이란 말인가? 불안이 퍼져나가는 것이 집단적으로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건 모두가 경험으로 아는 것이다. 흉흉한 민심이 기대하는 건 누군가를 탓하고,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는 손 쉬운 처방이 아니라, 그 불안을 모두 그러안는 넉넉한 마음과 커다란 비전일 것이다.
제발… ‘누구누구 때문이야’라고는 말하지 말자.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드는 것도 대통령의 탓인 나라로 남아서는 희망의 미래를 품을 수가 없다. 지금의 위기는 누군가의 탓이 아니라, ‘신용’이라는 현혹에 존재하지 않는 가치를 허공에 세워두고 기뻐하던 우리 모두의 무지와 욕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를 탓한다고 고통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불안한 미래를 전망했다는 이유로 입막음을 당하는 미네르바의 탓이 아니다. 잘 못된 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성실한 인내심을 갖고 성난 목소리를 달래야 할 때이다.
인터넷은 열린 공간이다. 국민의 마음 속에 자리 잡은 불안의 정도가 어느 만큼인지, 그들의 고통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그들이 불신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날것으로 드러내주는 공간이다. 그 공간 속으로 들어와 차분히 앞으로의 위기를 헤쳐나갈 방안을 이야기하는 것이 순서이지 않을까? 미네르바의 독설 같은 전망에 대해 찬찬히 근거를 들어 보이며,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전망을 이야기하는 지도자를 만나고 싶다. 불길한 목소리를 잠재울만한 통찰력 있고 성실한 설득의 이야기를 인터넷에서 만나고 싶다. 우리의 디지털 문화가 그 정도의 성숙함은 보여줄 역량은 안 된단 말인가? 그도 이야기 할 수 없다면… 그저 입을 다물고 ‘누구누구 때문이야’라고는 말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