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면 AI가 추천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어제의 기분, 오늘의 날씨, 평소의 취향을 종합해 선곡된 플레이리스트다. 커피를 마시며 훑어보는 뉴스도 내 관심사에 맞춰 큐레이션되어 있다. 출근길에 들를 카페도, 점심에 먹을 메뉴도, 퇴근 후 볼 영화도 모두 ‘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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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리즘이 그려내는 나의 초상
초개인화(Hyper-personalization)의 시대1가 도래했다.
AI는 우리의 클릭 하나, 스크롤 하나, 머무는 시간 하나까지 학습하며 ‘진짜 나’를 파악한다. 수천, 수만 개의 데이터 포인트로 만들어진 디지털 초상화는 때로 거울보다 더 정확하게 나를 비춘다. AI는 어떻게 나에 대해서 이렇게 정확하게 알수 있을까? 내 정보는 도대체 어디서 얻은 것인지, 내가 무심코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이 녀석의 학습데이터가 된다는 건가? 그렇다면 나는 AI가 나를 아는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 AI가 작동하는 원리와 이들의 학습에 쓰이는 데이터의 종류와 내용은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개인 정보를 철저하게 관리하고 데이터 주권을 지키는 것만큼이나, AI가 제안하는 수많은 선택지들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작동 원리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신기하게도 내 입맛을 딱딱 맞춘다고 무작정 좋아하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때로는 AI의 제안과 선택지들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나만의 주관으로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깊이 생각해보자.
선택의 무게가 사라진 세계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 누구를 만날지, 어떤 일을 할지—이 사소하고도 중대한 선택들이 모여 ‘나’라는 존재를 구성한다. 그런데 AI가 이 모든 선택을 대신한다면? 더 정확히는, 선택의 여지를 극도로 좁혀 ‘최적화된’ 옵션만을 제시한다면? 그리고 우리는 그 선택의 갈등을 없애주는 달콤한 마법에 길들여져, AI가 가져다주는 편리하고 안전한 선택에 안주하려고만 한다면?
망설임과 갈등은 비효율적인 것으로 치부되기 쉽다. 하지만 카페 메뉴판 앞에서의 5분간의 고민, 넷플릭스 화면을 30분째 스크롤하는 그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인간다운 순간이 아닐까? 불확실성 속에서 자신을 탐색하고, 실패할 자유를 누리며, 예상치 못한 발견을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선택이 가진 본질적 가치다.
자기 인식과 자아정체감의 아웃소싱
더 깊은 문제는 자기 인식의 영역에서 발생한다. AI 어시스턴트가 나의 감정 패턴을 분석해 “당신은 지금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며, 이는 지난 3개월간의 수면 부족과 관련이 있습니다”라고 알려준다면? 내가 미처 인식하지 못한 나의 상태를 AI가 먼저 파악하고 진단한다면? 누군가 내 속내를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걸 느낄 때면 문득 섬뜩한 두려움이 드는 것처럼, AI에 대한 두려움은 어쩌면 그것이 나를 너무 잘 알고 있다는 데서 비롯될지도 모른다.
자기 성찰은 인간 고유의 능력이자 의무이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명제는 2,4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지침이다. 그런데 이제 그 역할을 AI에게 위임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면을 들여다보는 성찰의 시간이 사라지고, 마음을 되돌아보며 자기 자신을 형성해가는 성장의 시간을 AI의 데이터 분석 리포트가 대신하려 한다.
인간은 지나치게 편리한 도구가 등장할 때마다 그것에 지배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보여왔다. AI의 지배나 AI에 의한 멸망 이야기는 넘쳐나지만, 정작 가장 위험한 것은 우리가 스스로의 인간됨을 성찰하지 못하고, 자아 정체성과 건강한 메타인지 자체를 외주화하게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스스로 탐구하고 정의하는 대신, 알고리즘이 그려준 프로필을 수용한다. “당신은 이런 사람입니다”라는 AI의 판단이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라는 자기 인식으로 곧바로 전환된다면, 우리는 정말 독립된 영혼을 가진 주체적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선택권과 다양성의 역설적 폐해
초개인화는 역설적으로 획일화를 낳는다. 각자의 취향에 맞춘다는 명목 하에, 우리는 점점 더 한정된 선택지와 취향의 경향성에 갇혀들고 있다. 알고리즘은 우리가 좋아할 만한 것만을 계속 제시하고, 우리는 그 안에서만 선택한다. 그 경계의 바깥을 상상하거나 다소 엉뚱하지만 모험적인 선택을 통해 얻게 되는 자기 정체성을 잃어갈지도 모른다. 필터 버블(Filter Bubble)2은 더욱 두꺼워지고,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일정한 경향성 안에 가두는 에코 체임버(Eco Chamber)는 더욱 단단해지고 있다.
진정한 다양성은 불편함을 감수할 때 생겨난다. 취향에 맞지 않는 음악을 듣다가 새로운 장르를 발견하고, 관심 없던 분야의 책을 읽다가 사고의 지평이 넓어진다. 우연한 마주침, 예상치 못한 충돌, 낯선 것과의 조우—이런 것들이 사라진 세계에서 우리는 과연 성장할 수 있을까?
새로운 자율성을 지켜 내려면
그렇다면 우리는 AI 시대의 러다이트 운동3을 해야 할까? 기술의 진보를 거스르려는 시도가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듯이, 발전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힘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되돌릴 수 없다. 단순히 기술을 거부하고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된 기술 장치와 시스템과 어떤 관계를 정립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제도화해야 한다. AI의 추천을 참고하되 맹신하지 않고, 데이터 분석을 활용하되 의존하지 않는 것. 무엇보다 ‘불편할 권리’, ‘실패할 자유’, ‘방황할 용기’를 지켜내는 것이 중요하다.
초개인화 시대의 진정한 자율성은 AI가 그려준 안전지대를 의도적으로 벗어나는 데서 시작된다.
알고리즘이 추천하지 않은 영화를 보고, 데이터가 예측하지 못한 선택을 하며, 효율성이 떨어지더라도 스스로 고민하고 결정하는 것. 이것이 인간다움을 지켜내는 작은 저항이자,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실천이다.
나를 아는 것은 여전히 나의 몫이다. AI는 우리의 문제 해결력을 높여주는 도구일 뿐, 우리 삶의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게 해서는 안 된다. 초개인화의 편리함 속에서도 자아의 성찰과 건강한 자존감, 그리고 우리의 선택권을 지키는 것—이것이 바로 디지털 리터러시와 함께 이 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새로운 시민 역량, AI 리터러시인 것이다.
[참고]
- 초개인화된 경험이란 기존의 세그먼테이션이 나이, 성별, 거주지역, 라이프스타일 등 개인별 특성을 중시했다면 초개인화란 소비자의 상황과 맥락을 실시간으로 파악한 뒤 니즈를 예측해서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통칭합니다. 즉 특정 고객이 지금 구체적으로 원하는 것에 초점을 두며 더 나아가 고객이 인식하지 못한 니즈, 예측하지 못한 경험을 제공하는 것까지 아우릅니다.(출처: 삼성 SDS 인사이트 리포트 “초개인화 시대의 고객 경험 전략 – Z세대 특성을 중심으로” 중에서)
- ‘필터 버블’이라는 용어의 창시자인 엘리 패리저는 필터 버블이 확증편향과 선택적 인지를 일으킬 수 있는 일종의 정보 검열이 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지적한다. 그는 자신의 저서 \<생각 조종자들>에서 정보를 필터링하는 알고리즘에 정치적 혹은 상업적 논리가 개입되면, 필터링을 거친 정보만을 받아보는 정보 이용자들은 모르는 사이에 정보 편식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 타의에 의해 가치관 왜곡이 일어날 수 있음을 우려한다.
- “기계는 그들에게 있어서 자본주의적 생산기구 아래 도입된 것으로, 인간을 노고(勞苦)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며 노동자에게 있어서 기계는 그들의 노고를 더욱 증대시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기계를 때려부수는 행위는 기계를 소유하는 자본가에 대한 증오를 나타내는 하나의 변형이었다. 러다이트(Luddite) 운동은 1811년과 1812년 사이에 일어난 대규모적인 기계부수기 운동이었고, 노팅엄셔·요크셔·랭커셔를 중심으로 수많은 역직기(力織機) 편기가 파괴되었다.”